'아무도 모른다' 일본 영화 리뷰(스포 주의)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그러나 애들 영화가 아니다. 아이들은 엄마에게 버림받는다. 그러나 절절한 비극도 아니다. 올망졸망 네 아이들이 꾸려가는 행복과 외로움의 시간, 그리고 절망. <아무도 모른다>는 이렇게 삶을 담는다. 1988년 도쿄, 아이들이 있었다. 엄마는 하나지만 아버지는 모두 달랐다. 네 명 중 셋은 출생신고도 되지 않은 상태였고 당연히 학교도 가지 않은 채 엄마와 함께 다섯 식구가 살았다. 어느 날 엄마가 홀연히 집을 떠났다. 그로부터 6개월 동안 좁은 아파트에서 네 명의 아이들은 제 힘으로 살림을 꾸렸다. 이들 중 한 명이 우연한 사고로 죽기 전까지 아무도 이들의 존재를 몰랐다. 사실이 알려지면서 방송과 신문에선 아이들의 비극을 샅샅이 파헤쳤다. 정체모를 엄마는 모성을 저버린 비정한 여인으로 부각됐고, 가여운 아이들에 대한 동정이 쏟아졌다. 무관심한 이웃들에 대한 비난, 현대인의 단절된 삶에 대한 반성, 아이들의 미래에 대한 우려, ‘나시 스가모의 버림받은 4남매 사건’으로 명명된 충격은 한차례 파란을 뿌리고 지나갔다. 그리고 곧 잊혔다.
조용한 가족이 산다
15년 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이 실화를 마음에 품고 있었다. 처음 뉴스를 통해 사건을 접했을 때는 네 아이 중 맏이인 12살짜리 큰아들을 화자로 독백 형식의 내러티브를 구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엄마의 나이보다 더 나이를 먹게 되면서 그의 생각도 차츰 바뀌었다. 거리를 두고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자 그는 아이에게 깊숙이 공감하기보다 아이의 곁에 서 있는 것이 자신의 위치라고 느꼈다. “때때로 아이의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기운을 북돋아줄 수 있는 정도가 내 몫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포옹하는 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누군가를 포옹하게 되면 그가 보는 것을 나는 볼 수 없다. 그 아이와 같은 것을 보기 위해서는 내가, 또 카메라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2003년 <아무도 모른다>를 완성하면서 그는 1988년의 사건을 단순한 비극으로 재현하거나 적극적으로 껴안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영화는 더없이 밝다. 실화의 비극적인 세팅을 그대로 옮겨오면서도 감독은 아이와 엄마의 캐릭터를 자신의 관점에서 새롭게 창조했다. 아이들의 나이와 성별, 성격은 실제와 무관하게 픽션으로 꾸며졌다. 이렇게 만들어진 영화는 외부에서 상상하는 것 같은 참극이 아니다. <아무도 모른다>는 그렇게 시작한다. 아이들이 있다. 12살부터 그 아래로 네 명. 그 또래 아이에게 기대하듯 천진하고 맑다. 혼자서도 즐겁고 끼리끼리 어울리면 더 시끄럽다. 그런데 가만 보면 이들, 어딘가 이상하다. 새 집으로 이사 온 첫날, 아이들에게 주어진 첫 번째 규칙은 “절대 밖으로 나가지 않을 것”이다. 맏이를 제외하면 이웃들은 이 집에 세 명의 아이가 더 있다는 사실을 모른다. 셋째와 막내는 트렁크에 담긴 채 집안으로 들어왔고, 둘째는 이사가 끝날 때까지 먼 곳에서 기다리다 밤이 되어서야 숨어들었다. 장을 보고 쓰레기를 버리고 바깥일을 처리하는 건 큰 아이의 몫, 나머지는 늘 집을 비우는 엄마 대신 빨래를, 청소를, 밥을 한다. 아무도 학교에 가지 않고 아무도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지만 이들에겐 나름의 질서가 있다. 그렇게 평온하게 살아간다. 한편에서 철없는 엄마는 마냥 즐겁다. 가늘고 앵앵거리는, 일본 여성 특유의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아이들을 앉혀놓고 떠들어 댄다. 밤늦게 들어와선 밥 달라며 투정 부리고, 집안에 갇혀있는 딸에게 예쁜 배낭을 선물로 사 오고, 12살짜리 아들에게 새 애인이 생겼다고 귀띔한다. 어처구니없지만 이상할 정도로 명랑하고 긍정적인 그녀에게 화를 내는 건 쉽지 않다. 아이들을 성의껏 돌보지만 애틋한 모성 따윈 그녀에게 없다. 아이들도 엄마를 잘 따르지만 무작정 보살핌 따윈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날, 얼마간의 돈과 짧은 편지를 놓고 엄마가 사라진다. ‘당분간’ 집을 비울 예정이라는 말. 아이들은 그들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이제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아무도 모른다>는 이제 아이들의 얘기가 된다. 엄마 없는 집에 내버려진 어린아이들, 그들이 뜻밖에도 어떻게 제 세계를 만들고 제 삶을 즐기며 살아가는지가 중심이 된다. 물론 마냥 행복할 수만은 없다. 엄마가 놓고 간 돈은 서서히 떨어져 가고, 간신히 읽고 셈하는 법을 알고 있는 맏이는 남은 돈을 차근차근 쪼개어 최소한의 식량을 산다. 동생들을 보살피려 애쓰지만 점점 집안이 어지러워지는 걸 막을 수는 없다. 머리카락이 자라고 옷에는 구멍이 난다. 가스가 끊기고, 수도가 끊기고, 전기가 끊긴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공원에서 물을 떠다 머리를 감고 일회용 라면 용기에 심은 식물에 물을 주며 활짝 키운다. 학교에 가지 않고 공원을 맴도는 왕따 소녀를 친구로 만들어 집으로 데려오기도 하고 다 함께 먹을 것을 사들고 소풍을 나서기도 한다. 초라한 이들의 머리 위로 여름 햇살이 밝게 비친다. 눈부시게, 처연하게, 날들은 화창하기만 하다.
아이들은 자란다
왕따 소녀 사키 역의 칸 하나에 가 스즈키 세이준의 <피스톨 오페라>에 출연했던 걸 제외하면 영화 속 아이들은 모두 연기 경험이 전혀 없는 신인들이다. 감독은 그들에게 연기를 원하지 않았다. 딱 그 나이의 아이들만큼 행동하게 했고 아이들의 몸에 밴 특징들을 그대로 살렸다. 영화에서 그렇듯 셋째 시게루 역의 기무라 히에이는 실제로도 인스턴트 라면을 즐겨 먹었고, 막내 유키 역의 시미즈 모모코는 정말로 아폴로 초코를 좋아했다. 둘째 교코 역의 키타우라 아유는 장난스레 웃고 떠들다가도 어느 순간 조용한 과묵함을 보여주곤 했다. 맏아들을 연기한 아기라 유야는 촬영 기간 동안 나이만큼 부쩍 자랐다. 영화의 처음엔 앳된 소년의 모습이, 마지막엔 세상의 어둠을 조금쯤 맛본 변성기 청소년의 얼굴이 함께 드러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카메라에 담았다. 그 결과 아기라 유야는 2004년 칸 국제영화제에서 톰 행크스와 제프리 러시, 가엘 가르시에 베르날 등 관록의 배우들을 제치고 최연소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신데렐라가 됐다. 그러나 여기에 굳이 열연이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무의미하다. 유야와 아이들의 연기는 자연 그 자체다. 자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시작해 차츰 연기를 터득해 가면서, 눈물을 흘리거나 소리를 지르는 일 한 번 없이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그대로 몸에 익혔다. 덕분에 영화는 보는 이의 마음에 성큼 들어온다. 훗날 아이들의 생활이 힘겹고 서글프게 변해가면서 그 디테일은 보는 이의 가슴을 저미는 칼이 된다. 여느 영화의 세 배에 이르는 1년의 촬영 기간은 이 현실을 담는 데 할애됐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처음부터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함께 노는 것으로 시작했다.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모든 행동을 비디오로 찍으며 카메라에 익숙해지게 만들었다. 어떤 상황에서 누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꼼꼼하게 기억해 두었고 각각의 성격에 어떤 차이가 있는지 면밀히 관찰했다. 첫째는 몇 번의 테이크를 거듭할수록 좋은 연기를 보이지만 셋째와 막내는 첫 촬영에서 가장 좋은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을 알고, 그들이 함께 등장하는 장면에선 어린아이들의 모습을 먼저 잡고 그다음에 큰 아이의 연기를 촬영하는 식으로 모두에게 가장 좋은 연기를 뽑아냈다. 결말을 제외하곤 미리 줄거리를 정해 두지도 않았다. 가을부터 다음 해의 여름에 걸쳐 있는 시간을 촬영하면서 한 계절이 끝날 때마다 편집을 마치고 다음 계절의 이야기를 구상하는 식으로 느릿하게 작업했다. 다큐멘터리를 연상시키는 솔직하고 거친 화면은 그렇게 완성됐다. <원더풀 라이프>(1998)부터 함께 작업했던 촬영감독 야마자키 유타카는 <아무도 모른다>에선 인공적 조명 없이 자연광을 이용해 좁은 아파트를 따뜻하게 그렸다. 시시각각 변하는 아이들의 천연한 표정도 놓치지 않았다. “얼굴 클로즈업을 사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너무나 귀여웠기 때문에.” 감독은 잦은 클로즈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며 웃는다. 그의 말처럼 아이들 넷은 하나같이 사랑스럽다. 영화와 달리 평범한 가정에서 귀여움 받으며 자란 아이들답게 그늘 없이 맑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영화 속 엄마가 떠난 빈자리에선 어느 순간 외로움을 표현할 줄도 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이라면, 설령 좋아하지 않는 이라도, 스크린에 펼쳐지는 이들의 앳된 사랑스러움은 <아무도 모른다>를 보는 내내 행복이 되어 준다. 그러나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점점 꺼져간다. 영화의 마지막 계절은 온 세계에 생기가 넘치는 더운 여름날, 그 가운데 힘없이 늘어져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앞선 생기를 기억하기에 한없이 슬프다. 이토록 깨지기 쉬운 아이들을 더 이상 지켜보는 일이 고통스러워진다.
이제는 탓할 수 없다
가장 쉬운 방법은 엄마를 탓하는 것이다. 어떻게 자식을 버릴 수 있느냐는 고정관념에 호소하는 일은 쉽다. 그다음으로는 비정한 사회를 한탄하는 것이다. 어떻게 옆집에서 아이들이 굶주리는데 존재조차 모를 수 있는가 비난하는 마음이 절로 든다. 더구나 이토록 예쁜 아이들이라면 눈물쯤 흘려주는 일은 어렵지 않다. 아이들은 나라의 희망이며 마땅히 보호받아야 한다는 건 누구나 읊을 수 있는 대외적인 상식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이렇듯 비정한 사회 고발극, 또는 절절한 멜로드라마로 흐르기 쉬운 많은 요소를 갖췄다. 그러나 영화는 쉽사리 엄마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나는 이 캐릭터가 나쁜 엄마로 비치거나 모든 일이 그녀의 잘못 때문에 일어났다는 인상을 받지 않길 원했다. 관객들이 그 같은 인상을 받는다면 그건 이 영화의 원안이 된 실제 사건이 일어났을 때 언론이 다뤘던 방식과 같은 결과가 될 것이다. 엄마 또한 자신의 특수한 상황의 피해자다. 어쩌면 그 또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이들을 사랑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아이들의 높이에 시선을 맞춘다. 카메라는 아이들에게 밀착돼 있고, 아이들이 사는 세계는 그들의 눈을 통해서만 그려진다. 문제를 바라보는 것은 어른이 아니다. 아이들 자신이며, 아직 이 비정한 세계를 다 알지 못하는 그들의 눈이다. 그들은 자신이 버려진 희생자라는 걸 모른다. 삶에 대한 본능적인 끈기와 열정, 쉽게 깨어질 듯하면서도 끊임없이 일어나는 생명력, 어찌 됐든 살아가야 하는 삶의 불가해성이 그들에게 있다. “어떤 도움도 없이 완전히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황에 놓였을 때 아이들의 생기를 더 쉽게 볼 수 있다”라고 말하는 감독은 버려진 아이들 속에서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해가는 이들의 풍요로움을 보았다. 지지 리궁 상인 생활 속에서도 그들만의 기쁨과 슬픔, 고난과 극복, 갈등과 이해, 그리고 행복이 있다고 상상했다. 실제로 우리들의 삶이 그러하듯이. 그러니 사회를 탓할 것도 없다. 당신은 옆집의 가족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영화 속에선 꼭 한 번, 밀린 집세를 독촉하러 온 주인이 아이들의 집을 찾지만 “엄마는 다른 지방에 출장 가셨다”는 말에 의아해하며 돌아설 뿐 그 외의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다. 이런 모습은 그 시절에만 국한된 일도 아니다. 시나리오를 쓰기 전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15년이 지난 지금 아이들의 상황이 달라졌는지 자문해 보았다. 일본 교육부의 조사에 따르면 1987년 당시 533명이었던 집 없는 아이들의 수는 2000년 302명으로 줄었지만, 출산율이 감소했다는 걸 감안하면 이 같은 수치는 오히려 아키라와 그 남매들과 같은 상황에 처한 아이들이 더 늘어났다는 것을 알려줄 뿐이었다. 감독은 이런 비극이 어쩌면 현대 사회의 자연스러운 결과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칸 국제영화제에서 만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기자들은 이런 일이 세계 곳곳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사건임을 말해 주었다. 일본의 가족들은 점점 더 핵가족화되고 있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함께 살지 않는다. 아이들의 부모는 자신의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 하는지 부모에게 묻거나 도움을 요청할 수 없다. 게다가 점차 원자화되는 도시의 생활에선 이웃에게 아이들을 돌봐달라고 부탁할 수 없다. 양육의 책임은 오직 엄마들에게만 지워진다.” 다행히도 세상은 그리 매정하지만은 않다. 엄마가 떠난 후 구원의 손길은 가끔씩 찾아온다. 아이들이 즐겨 찾는 편의점 직원은 정기적으로 유통기한 지난 삼각김밥을 빼돌려 아이들에게 건네며 조금이나마 굶주림을 견디게 해 준다. 여기에 대고 꼬마들은 “연어 맛은 없냐”며 아이다운 투정을 부릴 기회를 갖는다. 공원에서 사귄 낯선 친구는 중년 남자와 가라오케에서 노래를 불러주고 돈을 받아 생활비를 건넨다. 여기에 대고 아키라는 “그런 돈은 받지 않겠다”며 거절하지만 결국 마지막엔 도움을 청한다. 아키라와 사키, 로맨스를 맺기엔 너무 어리고 아이가 되기엔 너무 커버린 어중간한 이들은 외로움을 알아주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돕는 법을 배우며 성장한다. 하나 도움은 영원할 수 없다. 엄마가 남긴 돈이 떨어져 가자 아키라는 생활비를 구하기 위해 남매의 각기 다른 아버지(로 추정되는 남자)들을 찾아간다. 어떤 이는 푼돈을 쥐어주지만 어떤 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며 문을 닫는다. 엄마에겐 핸드폰이 있지만, 외부의 누군가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웃으며 받을 땐 유용하던 그 번호를 아이들은 모른다. 몇 푼 남은 동전을 들고 아키라는 엄마를 수소문해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은 이가 엄마를 찾으러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공중전화에선 동전이 찰칵찰칵 떨어지고 결국 전화는 끊어진다. 그 순간에 스치는 짧은 절망. 이 같은 장면들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상기된다. 영화는 맑게 빛나는 아이들의 웃음 속에 차츰 절망을 배우는 경험을 삽입함으로써 울컥하는 감정을 솟구치게 한다. 그것을 엿보면서 한때 아이들처럼 밝고 명랑해졌던 관객의 마음은 서서히 동요한다. 우리는 이미 어른이 되어 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우리의 가슴은 한편이 무겁다. 영화는 정교한 방식으로 관객을 자극한다. 결코 누선을 짓누르지 않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정체모를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도 살아가기 위하여
종반을 향하면서 영화는 비극으로 한 걸음씩 옮겨간다. 생활은 점점 힘겨워지고 한 번쯤 돈을 부치던 엄마는 아예 소식이 끊어졌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 이들에게 치명적인 사건이 찾아온다. 아이들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일이다. 보는 이의 가슴이 먹먹해진다. 차마 눈물을 흘릴 수 없어 가슴이 저릿해 온다. 그러나 아키라는 자기 힘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을 한탄하지 않는다. 조용히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남은 날들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누가 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 줄 수 있을까. 누가 이들의 삶을 되찾아 줄 수 있을까. 아무도 그 답을 정할 수는 없다. 일련의 영화들을 통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물어 온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아무도 모른다>에 이르러 가장 찬란하고 지독한 방식으로 이토록 외로운 삶을 계속 살아야 하느냐고 다시 묻는다. 영화는 “그렇다”라고 답한다. 왜 사냐고 묻지 않고도 끈질기게 살아가는 아이들을 통해 그들의 머리 위에 하얗게 비치는 햇살을 통해, 쓸모없는 감상에 빠지지 않고 이 생의 욕구를 되찾아야 한다고 조용히 가르쳐 준다. 밝게 웃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 우울한 망상은 곧 사라진다. 그래도 살아가고, 그래도 웃을 수 있다. 그것이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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