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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리뷰, 해석, 감상평

'청춘' 연극 감상 리뷰

'청춘' 연극 감상 리뷰

'청춘' 연극 감상 리뷰
'청춘' 연극 감상 리뷰

제목이 좋았다. 청춘, 꼼지락거리는 구두를 벗다. 포스터도 좋았다. 다 헤어진 구두로 쑥 떨어지는 듯한 한글 자모의 형상이 보기 좋았다.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배우도 나왔다. 극의 시작은 무용이었다. 나는 연극이라고 생각하고 갔지만, 또 어떻게 보면 무용 공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용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내게는 조금 걱정이 되어 긴장이 되었지만. 순간 든 생각. 몸의 언어라고 해서 별반 다를 것이 있을까. 생각을 표현하기는 마찬가지인 걸. 그냥 편안하게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지. 긴장이 조금은 풀렸다. 서서히 극에 집중되어 갔다. 조금은 쓸쓸한 듯한 음악. 격정적이지만 쓸쓸한 탱고. 마치 소음과 같은 소리가 담긴 음악. 그리고 그를 둘러싼 몸짓, 언어. 어쩌면 책에서 보아왔던 원시 종합예술형태라고 하는 발라드 댄스가 이런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간과 인간 - 잘은 모르지만 사업에 골몰할 게요

특이한 공간. 시멘트 벽에 담쟁이가 군데군데 무리를 짓지 못하고 기어오르다만 모습. 벽 가운데는 조그만 공간이 있고. 그 공간에는 사람 둘이 앉으면 조금 여분이 있는 난간 같은 게 있다. 그 난간으로 들어오는 갈색의 문. 금고의 문처럼 생긴. 그리고, 시계추 둘. 시계추의 그림자가 문 옆에 나무둥치처럼 드리워져 있다. 어떻게 묘사를 해도 정확하게 할 수 없지만. 그 공간을 보면서 나는 달리의 그림을 떠올리고 있었다. 조금은 환상적인. 어쩌면 있을 수도 없는 그런 공간이 아닐까 하는. 뭐. 그래서였겠지. 공간으로 가방을 끌고 들어오는 한 사내. 그 가방에서 여자아이를 꺼내어 벽에 고정을 시키고는 쓸쓸하게 쪼그리고 앉는다. 정말, 쓸쓸하게 쪼그리고 앉았다. 감정이 편안하지가 않다. 마음이 슬슬 답답해져 온다. 시계추 둘. 길이와 모양이 다른 그 둘은 근본적으로 서로 똑같이 움직일 수가 없다. 그 둘을 강박적으로 맞추려는 또 다른 사내의 움직임에서 나는 뭔가 거부할 수 없는, 저항할 수 없는 것에 저항하는 인간의 모습을 읽었다. 의미 없는 낱말을 반복하는 그, 그 낱말을 반복하며 눈치를 보는 그. 그러나 결국 다 이야기해버린 그. 무용하는 이들 역시 일정한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범위에서의 동작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놀이를 하는 것 같고, 어떻게 보면 연애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 같고, 또 어떻게 보면 약간 무의미한 동작을 하는 듯한데. 공통점은 타인의 공간을 침범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하여 침범하는 듯하나 결국 사라지고 마는 신기루처럼 퇴장해버리는 동선을 가지고 있다고 해야 하나? 여하튼 그랬다. 그리고 늘 남는 한 명. 그들은 정말 이상의 시구절처럼 "잘은 모르지만 외로된 사업"에 골몰하고 있었다. 쓸쓸한. 느낌. 조금 먹먹한 느낌.

꺼지다. 벗다. 사라지다.

이 극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사는 꺼지다였다. 꺼지다. OFF. 하나둘 꺼져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사내. 중얼거리듯 읊조리는 꺼지다는 대사는, 이미 슬프고 먹먹한 감정에 사로잡혀있던 내게 눈물 한 방울을 선사했다. 젠장. 꺼지다는 말이 왜 그렇게 그 순간 슬프게 들리던지. 그리고 사내. 모래가 묻은 발을 털어낸다. 미친 듯이 털어낸다. 긁어내듯 털어낸다. 무슨 강박증 환자처럼. 역시 거부할 수 없는 것에 거부하는 몸짓. 저항이라기보다는 애써 어떻게 해보려는 반항 같아 보이는 느낌. 깔깔한 모래의 느낌. 삶도 그런 거겠지? 그래서 그렇게 미친 듯이 털어내려는 거겠지? 이 장면에서의 유재명 씨의 연기는 너무 능청스러웠다. 너무 능청스러워서 더 처연했다. 또 한 사내 등장한다. 시계추 모양이 나무 등걸처럼 드리운 조그만 공간에 등장한다. 물구나무를 서더니 억지로 신발을 벗어낸다. 긁어내듯 벗어낸다. 툭. 하강. 조금 과장하자면 죽음의 느낌, 소멸의 느낌. 여전히 먹먹한 나. 객석 쪽에서 무용수들이 등장해 모래 속에서 구두를 하나 파낸다. 좀 전의 상황과는 정반대의 형상. 재생의 느낌이랄까. 그들은 그것을 가지고 논다. 아주 유쾌하게. 순간적으로 무대의 분위기는 판이하게 달라진다. 어쩌면 이게 또 다른 기준점인가.

4 시간 - 그래도 어찌할 수 없는 떠남.

무용수들이 가지고 놀던 구두를 들고 등장하는 여자아이. 그 뒤를 이어 온 몸에 구두를 감고 따라오는 사내. 삶의 무게만큼 무거운 구두들을 가진 사내와 가볍게 하나만 들고 서 있는 여자아이. 누가 더 가벼운 건지는 보기만 해도 뻔하다. 누가 더 도망가기 수월할지도 보기만 해도 뻔하다. 여자아이. 맞지도 않는 구두를 신더니 즐거워한다. 그러더니 사내를 두고 떠나버린다. 어항을 안고 여자아이가 등장한다. 시계추 아래에 앉더니, 툭. 하더니만 모래가 떨어진다. 시간이 흐른다. 모래시계처럼 정해진만큼의 시간만 흐를 것이다. 물끄러미 보고 있다. 여전히 느린 움직임. 꽤 쓸쓸하다. 혼자 잘 남아있던 무용수가 등장한다. 줄이 내려온다. 또 죽음의 형상. 그 줄에 목을 걸고, 위태로운 움직임을 진행한다. 안타까운 느낌이 들었다. 뻔히 결말을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 줄을 가지고 노는 듯하다가, 어라 타고 올라가버리는 것이 아닌가. 해방인가? 자유인가? 나는 모르겠다. 다만 슬펐다. 소멸되었으므로. 조그만 무대에 처음처럼 등장한 사내와 여자아이. 하지만 등장 방식은 달랐다. 그들은 각기 하나의 방향을 보고 쓸쓸하게 앉는다. 턱 하고 무언가 떨어지는 느낌. 시계추를 멈추는 아까 그 사내. 억지로 맞추려고 했으나 맞춰지지 않던 시계추도 정해진 시간을 다 보냈나 보다. 아하, 멈추는 것은 맞추는 것보다 쉽다. 움직이는 것보다는 움직이지 않는 것이 더 쉽다. 저항하지 않는 것은 저항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아, 쓸쓸함이여. 이 외롭고 높은 쓸쓸함이여. 안도현 선생의 시 제목만이 입가를 맴돈다.

청춘 - 내 스무 살 그리고 지금의 나

극의 줄거리는 정확하지 않다. 사실, 줄거리가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나름대로 내가 기억하는 것도 일종의 파편 난 이미지일 뿐. 연결되는 고리는 없다. 공연 중 누군가가 계속 찍고 있던 셔터 소리의 영향인지, 아니면 내 기억의 한계가 그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정말 단편 단편 조각조각 이미지로 남아있다. 아마 무용이 많아서 그런가 보다. 어쨌든 몸의 언어는 아직은 낯선 언어니까. 혼자 돌아 나오는 길. 너무 쓸쓸했다. 쓸쓸해서 팸플릿 판매대에 있던 주혜자 님께 괜히 말을 걸었다. 하지만 그게 오래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 내 모래시계는 여자아이의 것보다 더 짧았거든. 딸랑 극 하나 때문에 이런 먹먹한 느낌을 온몸으로 받아쳐야 하나? 술이 고팠다. 혼잣말을 읊조리며, 그 컴컴한 길을 걸어 나오는데, 길을 잘못 들었다. 완전히 혼자가 된 것이다. 극 속의 그 남자 무용수처럼. 문득 스무 살 때 휘갈겨썼던 소설이 떠올랐다. 이제는 더 이상 쓰지 않는 글. 글이라는 게 자의식 과잉이 되어야 쏟아지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내가 특별하다는 것 혹은 남들과 다르다는 어떤 의식이 깔려있어야 그 특별하고 다른 나를 표현하기 위해 써대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 스무 살 나는 일종의 자의식 과잉이었다. 아니 스무 살 때까지의 나는 그랬더랬다. 지금의 나는 과잉된 자의식과 거친 세상을 구분 지어주던 얇은 세포막을 더 이상 가지고 있지 않다. 그래서, 그래 그 꺼졌다는 말에 그만큼 공감한 것인지도 모른다. 남들이 뭐라 하든 혼자서 공간을 지키며, 실수를 반복하던(물론 당사자는 그게 실수인지 모른다) 무용수를 보며 그처럼 살던 내 모습이 떠올라 더 쓸쓸했는지도 모른다. 이제의 나는 그 행동이 실수처럼 보인다는 것을 알기에. 그래서 더 어울리려고 하지만 쉽지 않다는 것을. 함께 술 마실 사람을 구할 수 없는 서먹한 순간. 내 일상이 참으로 비루하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결국 술 마실 사람은 구했고, 나는 삶을 다시 이어간다.

영화 감상 후 난 생각들

빛을 보며, 겨우 돌아나가는 길. 그래도, 갈 길이 있으니, 그리고 그런 시간을 보냈으니 이런 내가 있는 게 아니냐고 위안한다. 조금은 비루해 보일지라도 나름은 다 아름다운 거라고. 결국, 친구와 술 한 잔 걸치며 미친 듯이 수다를 떨었다. 내겐 AT필드가 필요해. 뜬금없는 내 말을 받아주던 그녀. 그녀 역시 깨지고 아프게 통과의례 같은 스무 살을 지나왔지만, 누구보다 지금 아름답지 않은가. 어쩌면 청춘. 거친 모래밭 같은 세상을 정해진 시간 내에 달려야 하는 숙명을 달고 있어도, 그래서 결국 깨지고 상처받고 떠날 수밖에 없지만 남는 건 비루한 삶뿐만 아니라 더불어 함께 공존하는 처연한 아름다움인 거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나는 그녀 몰래. 그래도 우린, 여전히 청춘이라고. 아직도 깨지고, 열정적으로 매달려야 할 그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고. 우리 삶을 위한 건배를 속으로 조용히 읊조렸더랬지. 꽤 오랜만에 많은 생각을 했다.